Friday, July 2, 2010

진정성

유혹자라는 입장 때문에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나.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진정한 자아는 누구와 같이 있든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클로이의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을 바꾸려는, 진정성이 결여된 시도를 되풀이했다.

상대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능란한 유혹 솜씨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위험한 관계>라는 책을 보면, 메르퇴유 후작부인은 발몽자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몽 자작의 연애편지가 너무 완벽하고 너무 논리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인의 말로 볼 수 없다고 까탈을 부린다.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그런 어줍은 질문들[그래도 내가 던진 질문 하나하나를 통하여 나는 그녀를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았다] 배후에는 가장 직접적인 질문으로 다가가려는 초조한 시도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나까?"[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나는 누구여야 합니까?"]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접근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내 방법이 거칠면 거칠수록, 내 연구 대상은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자신이 무슨 신문을 읽는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만 알려주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녀가 '누구'인지 깨우칠 수는 없었다. '나'라는 것은 필요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요리조리 빠져나갈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뿐이었다.

클로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일종의 겸손과 자기비하가 그녀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이 대화 주제로 떠오를 때면 클로이는 가장 가혹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냥 '나'라든가 '클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무능력자"라든가 "신경쇠약이 오필리어 뺨칠 여자"라고 말했다. 그녀의 자기비하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의 위장된 호소와는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멍청해요/아니,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하는 식의 대화를 노리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자기비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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